어린이병원 특집
사립 최초의 어린이병원,
세브란스의 20년과 앞으로의 길
연세의료원 이철 전임 의료원장
세브란스 어린이병원은 개원 이후 20년간 수많은 아이들의 건강과 웃음을 지켜온 국내 대표 소아 전문 병원이다.
그러나 이곳이 문을 열기까지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과 숱한 노력이 필요했다.
연세의료원 내부에서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재정적 어려움과 여러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계획이 수년간 미뤄졌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교수들이 뜻을 모으고, 기금을 마련하며, 병원 설립을 위해 헌신한 이야기가 있다.
세브란스 어린이병원의 설립 과정과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당시 개원 과정의 중심에 있었던 이철 전임 의료원장을 만나 들어보았다.
교수님께서 34년 전인 1991년, 연세의료원 아동병원 건립검토위원회 간사를 맡으셨습니다. 당시 제작하신 보고서를 보면, 1982년 의료원의 장기발전계획에 이미 아동병원 신축 계획이 있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개원은 2006년에 이뤄졌습니다. 개원까지의 과정과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린이병원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1986년, 1990년 연세의료원 발전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연세의료원이 소아 진료와 관련된 분과 교수 수가 국내에서 가장 많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소아과뿐 아니라 소아외과, 소아영상의학 등 9개 분야 이상의 소아 전문 진료 분야까지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린이병원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서울대병원은 1986년, 이미 어린이병원을 세웠습니다. 국립병원이었기에 국가 예산을 확보해 건립이 가능했죠. 반면 사립병원인 저희는 서울대보다 훨씬 많은 소아 진료 교수진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 발전 계획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결국 1991년, 서울대 어린이병원 설립 5년 후, 이유복 당시 의료원장님에게 134명의 의료원 교수들의 아동병원 설립 청원서가 제출되었고 이를 계기로 ‘연세의료원 아동병원 건립검토위원회’가 발족되었습니다. 위원장은 소아외과 황의호 교수님, 부위원장 소아과 한동관 교수님, 장준섭 강남세브란스병원 부원장님, 고윤웅 세브란스병원 부원장님, 산부인과 주임교수 송찬호 교수님, 소아신경외과 최중헌 교수님 그리고 제가 간사로서 실무를 수행하였습니다,
4차 회의 끝에 ‘병상 규모는 300병상이 적절하다’, ‘신생아 집중치료실(NICU)을 특화하자’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어 아동병원 건립을 위한 모금이 진행되어, 1991년 당시 10억 원이 모였습니다. 이 기금은 세브란스 소아과 출신의 모임인 ‘세아회’ 소아과 개원의 회원들과 교내 교수 42명이 많게는 2천만 원, 적게는 500만 원씩 기부해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건립으로 이어지진 못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소아 진료의 구조적 적자 문제였습니다. 우리나라 의료보험 체계에서 소아 진료는 검사와 시술의 폭이 좁아 수익이 적고, 반대로 인건비는 많이 듭니다. 예를 들어 가슴 X-ray 한 장을 찍더라도 성인과 달리 의료진 누군가 아이를 붙잡아줘야 하고, 혈관 주사 시에도 간호사 두세 사람이 도와야 하죠.
사립병원 입장에서는 이러한 적자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모아놓았던 아동병원 건립 모금액이 IMF를 거치면서 고금리 정기예금 복리이자로 불어나 약 30억 원이 되었고, 지훈상 의료원장님의 결단으로 2006년에 드디어 어린이병원이 개원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세브란스 어린이병원은 소아 진료를 사랑하는 교수들이 많았고, 소아 진료 분야가 국내에서 가장 세분화된 병원이었습니다. 소아외과, 소아안과, 소아이비인후과, 소아정형외과, 소아비뇨기과, 소아마취과, 소아영상의학과, 소아정신과, 소아재활의학, 소아심장, 소아신장, 소아신경, 소아혈액종양, 소아호흡기, 소아내분비, 소아소화기, 미숙아신생아 등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분화돼 있었죠. 이는 전적으로 당시 소아과 주임교수였던 윤덕진 교수님의 공이 큽니다. ‘대학병원이라면 소아 진료도 분야별 전임 교수가 있어야 한다’는 철학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던 교수들도 어린이병원을 위해 귀국하였습니다. 소아종양 김병수 총장님은 하버드대학교에서, 소아혈액 김길령 교수님과 소아신장 진료를 맡으셨던 김병길 교수님은 미국에서 활동하시다가, 모두 세브란스 어린이병원의 설립을 위해 돌아와 주셨습니다.
저는 신생아과를 전공했는데, 당시 국내에서 신생아과를 전공한 교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한동관 교수님은 프랑스에서, 또 서울의대 한 분은 일본에서 공부하셨고, 미국에서 공부한 소아과 의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최초로 미국 Brown대학 Women & Infants Hospital에서 신생아학의 대가 Willaim Oh 교수님께 신생아학을 배워 어린이병원에 힘을 보태게 되었습니다.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신생아 집중치료실(2025. 8.)
당시와 비교했을 때, 현재 소아 진료 환경은 어떻게 달라졌고, 앞으로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소아진료 각 분야에서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고 유능한 교수님들이 한 분 이상씩은 꼭 계셨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의사들이 진료과를 선택할 때 수입이 많은 과를 선호하게 되었고, 여기에 응급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 과는 기피하는 경향이 뚜렷해졌습니다. 소아 진료과는 특히 그런 기피 현상이 심합니다.
요즘은 워라밸, 즉 일과 삶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가 되다 보니, 내과나 외과도 마찬가지지만 소아과는 더욱 기피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바라는 점이 있다면, 소아 진료를 활성화하여 저출산을 극복하는 실질적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현재 소아과는 성인과 달리 행위별 수가가 거의 없고 주로 진찰료가 주 수입원이 됩니다. 검사나 시술 항목이 성인 진료에 비해 제한적이기 때문에 소아과 전공을 기피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소아 진찰료를 차등 지급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1세 미만은 성인의 5배, 미취학 아동은 3배, 학교에 입학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는 2배로 책정하는 겁니다. 이렇게만 바뀌어도 소아과를 전공하는 의사들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점은, 의료 대란이 발생해도 수가 조정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정책은 단순히 의사 인원 수만 늘릴 생각을 하는데, 이는 현장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나온 대책입니다. 소아과뿐 아니라 필수 의료, 지방 의료, 24시간 진료, 응급 진료 같은 분야는 수가를 높이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해당 분야를 전공하는 의사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세브란스 어린이병원이 개원 20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현재 병원에 있는 후배들과 제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신가요?
의사들 중에는 아무리 여건이 나쁘고 힘들어도, 아이들을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소아 진료를 선택하는 주관이 뚜렷한 의사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소아과를 전공한 이유 중 하나가 어른보다 아이들이 좋아서였고, 지금까지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경제적 이유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선택해 의사로서 보람과 긍지의 길을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하고 싶은 말은, 세계적 수준의 병원이 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지표 관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주간지 ‘뉴스위크(Newsweek)’는 매년 세계 병원 랭킹을 발표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새로운 어린이병원 건립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고, 많은 교수들이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브란스 어린이병원도 세계 10대 어린이병원에 이름을 올리거나, 최소한 국내 최고의 어린이병원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뉴스위크’ 같은 기관이 병원을 평가할 때는 수많은 지표를 사용합니다. 논문 편수와 인용횟수, 환자진료당 교원 수, 소아관련 진료과 수 그리고 병원 평판 등 주로 구체적인 숫자로 평가될 수 있는 항목들이겠지요. 정량적인 데이터가 기반이 되는 만큼, 어떤 지표가 점수를 높이는지 정확히 알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작업은 병원장만 알고 추진해서는 안 되고, 어린이병원에 속한 모든 교직원이 이런 지표를 공유하고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분야와 지표를 집중적으로 관리하면, 세브란스 어린이병원도 세계 10대 어린이병원 안에 들고, 우리나라 최고의 어린이병원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