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
과학과 감정 사이에서 길을 찾다
유전상담사 정해란
병원에서 환자와 가족이 가장 막막함을 느끼는 순간은,
단지 병명이 아닌 '유전 질환'이라는 이름이 붙을 때이다.
이럴 때, 복잡한 유전 정보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유전상담사이다.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따뜻한 상담을 이어가고 있는
세브란스 어린이병원의 정해란 유전상담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소개해 주세요.
저는 “생각하고(역지사지), 행동하며(역지행지), 느끼는(역지감지) 마음으로 간호하자”는 모토로 19년째 임상 현장에서 환자들과 함께하고 있는 간호사이자 유전상담사입니다.
2006년 7월 용인세브란스병원에 입사한 후 응급실, 심혈관 촬영실, 신경과 임상 전담간호사로 근무하며 수많은 환자의 위기 순간을 함께했어요.
또 연명의료 코디네이터로서 환자와 가족이 생명의 연장을 둘러싼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함께하면서, 의료적인 판단뿐 아니라 ‘공감과 소통의 간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연세대학교 간호대학원에서 임상전담간호사 교육을 받으면서 유전상담이라는 분야를 처음 알게 되었어요.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공부를 이어가다 보니 2024년 10월 20일 대한의학유전학회로부터 유전상담사 자격(성인, 소아, 암, 산전)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유전상담이란 정확히 무엇인가요?
유전상담(Genetic Counseling)은 유전 질환의 의학적, 심리적, 가족적 영향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합리적이고 의미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전문적인 과정입니다.
2006년 미국 유전상담사 협회(NSGC)에서는 유전상담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어요.
“유전 질환의 의학적, 심리적, 가족적 영향을 다루는 과정으로, 이를 통해 사람들은 유전 질환이나 질환의 재발 위험에 대해 정보를 얻고, 적절한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과정에는 질환의 발생 가능성에 대한 해석, 유전자 검사 선택 및 결과 해석, 가족력 분석, 심리사회적 지지 제공 등이 포함됩니다.
‘유전 상담(Genetic Counseling)’이라는 단어는 1947년 유전학자 Sheldon C. Reed 박사님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분은 생애 동안 4,000건 이상의 유전상담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969년, 미국 Sarah Lawrence College에 세계 최초의 유전상담 석사 프로그램이 생기면서 전문 분야로 자리 잡기 시작했어요.
1970년대에는 임신 중기 양수천자가 가능해지면서 산전 검사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이때부터 유전상담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고 볼 수 있죠.
유전상담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나요?
유전상담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이 핵심이에요.
크게 네 가지 역할이 있어요.
1. 정보 제공 – 유전 질환의 원인이나 유전 방식, 발병 가능성, 검사 및 진단 방법, 치료 가능성 등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요.
2. 의사결정 지원 – 예를 들어 유전자 검사를 할지 말지, 출산 계획이나 예방 전략 등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죠.
3. 정서적 지지 – 유전 질환 진단을 받았을 때, 혹은 검사 결과를 마주했을 때 생기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덜어드리고자 노력해요.
4. 가족 단위 접근 – 유전 질환은 가족력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환자뿐 아니라 가족 전체의 이해와 참여가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태아의 유전 질환 위험을 평가하고 출산 전 검사에 대해 상담하는 산전 유전상담, 유전적 질환이 의심되는 아동 및 성인의 진단과 관리에 대해 안내하는 소아 및 성인 유전상담, 유전적 암 증후군의 위험을 평가하고 유전자 검사 및 예방 전략을 상담하는 암 유전상담의 3가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어떤 업무를 맡고 계시나요?
현재 저는 처음 병원에 내원하시는 환자분들의 초진 상담, 검사 전후 상담, 산전 검사 및 PGT 환자 상담, 가족 검사 관련 상담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이나 산정 특례, 의료비 지원 사업, 환우 모임 등에 대해서도 안내해 드리고 있어요.
타과 협진 시에는 EMR(전자의무기록)을 통해 내원 사유와 병력, 가족력을 파악하고 필요시 가계도를 작성합니다.
처음 내원하시는 신환의 경우 진료의뢰서와 가져오신 자료를 확인하고, 검사 목적, 방법, 절차, 비용뿐 아니라, 검사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위험, 예상 결과 및 한계점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해 드려요.
검사 이후에는 임상유전학 인증의의 진료 결과를 바탕으로 가계 내 위험도를 평가하고, 가족 검사나 산전 검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설명을 이어갑니다.
임상유전과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세요.
제가 속한 임상유전과는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하님정밀의료센터 소속이에요. 센터장님은 강훈철 어린이병원 원장님이시고, 임상유전과는 ‘외유내강’의 오지영 교수님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수님의 외래를 든든하게 지켜주시는 김연희 외래간호사 선생님, 임상유전과의 살림을 책임지고 계신 재간둥이 황지은 진료지원 간호사 선생님과 막둥이 유전상담사인 제가 각자 맡은 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교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세브란스 어린이병원 임상유전과만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모든 환자에게 열려 있는 진료 접근성’입니다.
다른 병원들처럼 특정 질환이나 연구 중심의 운영도 필요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타 병원에서 시행한 검사와 동일한 검사를 반복해야 하거나 외래 방문을 중간에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다니던 병원에서 산정특례 재등록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날 교수님께서 외래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병원마다 각자 추구하는 방향이 있어서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고민이 되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저희같은 병원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 말씀이 공감 되면서 마음 속 큰 울림이 되었고, 이곳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 것이 참 감사하게 느껴졌어요. 우리 병원은 상황들을 유연하게 조율하고, 환자 중심으로 진료를 이어가는 것이 가장 큰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전상담사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사실 유전상담이 우리나라 보건의료 체계 안에서 제도적으로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에요.
별도의 수익이 발생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전상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저를 이 자리에 함께하게 해주신 강훈철 병원장님과 오지영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 자리는 단순한 인력 배치가 아니라, 유전상담사가 의료진과 함께 협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 주신 매우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리적인 환경이 마련된 만큼, 이제는 상담의 질과 깊이를 채워나가는 것이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전문적이면서도 따뜻한 유전상담사가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미국의 Genetic Education Certificate Program을 수강하며 저의 전문성을 더욱 넓히고자 해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유전 질환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가족 상담’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가족 중심 상담을 실현하기 위해 상담 이론에 대해서도 꾸준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가족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상담사가 되기 위해 계속 배우고 성장하려 합니다.
유전 질환이라는 무게감 있는 주제 앞에서 환자와 가족이 혼자 외롭지 않도록, 그들의 삶에 함께 걸어가는 조력자가 되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더 많이 듣고, 더 깊이 이해하며, 더 따뜻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