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과 세브란스 병원 초창기의 소아과


여인석 교수(연세의대 의사학과)


 1885년 4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병원인 제중원이 문을 열었다. 개원과 함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많은 환자들이 제중원으로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알렌 혼자 환자를 보았지만 얼마 후 헤론이 합류하여 두 사람의 의사가 환자를 보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886년에 지난 1년간 진료한 환자들에 대한 진료보고서를 펴냈다. 외래진료 건수로는 일만 건이 넘었고 실제 진료한 환자는 7천여 명에 달했다. 입원환자는 265명이었다. 이때는 당연히 분과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전문적으로 소아 환자를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아있는 환자 기록을 통해 당시 어떤 소아 환자를 진료했는지 엿볼 수 있다.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의 환자 통계(1세 아기)


먼저 외래환자 통계를 보면 모두 18개의 환자군별로 분류하였는데, 여성질환에 대한 분류항목은 있으나, 소아질환에 대한 분류항목은 없다. 소아환자가 많지 않았을 수도 있고, 주로 소아들이 걸리는 병이지만 다른 분류항목에 포함시켜 따로 분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소아’라는 명칭이 유일하게 붙은 것은 ‘복통[colic-infantile]’이다. 모두 12례가 있다. 또 한 례의 “신생아 아관긴급(Trismus Neonatorum)이 있고, 그밖에는 소아라고 특정되지는 않지만, 백일해와 같이 주로 소아들이 앓는 병명을 통해 소아환자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입원환자 통계에는 환자의 나이가 기재되어 있어 비교적 쉽게 소아환자를 구별할 수 있다. 20세 미만의 환자는 전체 265명 중 21명이다. 입원환자 중 가장 어린 환자는 1세의 남자아기였다. 병명은 ‘콜레라성 설사’로 3일 입원했고 다행히 치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 ‘하반신불수’인 6세의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특별히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 같다. 또‘음낭부탈장’이 있었던 10세의 남자아이에 대해서는 탈장정복술을 시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보고서에는 제중원의 도면이 실려있다. 도면에는 ‘접종실(vaccination room)’로 표기된 별도의 공간이 있는데 천연두 접종을 위해 마련된 공간으로 보인다. 다만 실제로 보고서에 접종과 관련된 언급은 없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접종이 이루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계획처럼 접종도 이루어졌다면 소아들이 주로 그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이 보고서 이후에 제중원에서 진료한 환자에 대한 통계를 자세하게 정리한 기록은 에비슨이 작성한 1901년 제중원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도 소아환자를 따로 분리하지 않아 소아환자 진료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병명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소수의 경우가 있다. 이 보고서에도 123명의 입원환자 통계가 있으나 아쉽게도 환자의 나이와 성별이 기재되지 않아 소아환자의 입원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입원환자가 내과와 외과로 구별되어 표기된 점은 1차년도 보고서에 비해 환자군에 대한 최소한의 분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맥라렌 선교사


소아과학의 교육은 다른 주요 과목에 비할 때 상대적으로 늦게 이루어졌다. 1905년부터 에비슨이 준비한 국문 의학교과서는 해부학, 생리학 등 기초의학과 내과와 외과, 산과 등 임상과목을 포괄했으나 소아과는 없었다. 소아과학이 독립된 과목으로 교육되기 시작한 것은 1912년부터인 것으로 확인된다. 3학년에 소아과학 강의가 있었으며, 호주 장로회 파송으로 진주 배돈병원에서 근무하던 맥라렌이 담당했다. 맥라렌이 1차대전 참전으로 한국을 떠난 이후에는 여러 사람이 임시로 소아과를 맡았으나, 에비슨의 아들인 디비 에비슨이 세브란스에 부임하여 소아과를 맡으며 비로소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소아과 진료와 교육이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